화요일은 밤이 좋아 트로트계 히어로 가수 주현미 나이 남편 임동신 직업 자녀→학력까지 조명 10년 동안 실종 관련 에이즈 사망설 이혼설 다 겪은 현재 근황은?

지난 13일 오후 방송된 TV조선 ‘화요일은 밤이 좋아’에 트로트 가수 주현미는 나이가 퇴색한 모습으로 등장해 직접 자신의 근황을 전하면서 그의 나이와 남편, 자녀, 대표적인 노래 등에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날 방송에서 주현미는 자신의 대표가 중 하나인 ‘울면서 후회되네’를 열창했다.

이 곡은 1992년 발표 이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가수 주현미는 후배들의 무대를 바라보며 따뜻한 반응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주현미는 올해 62세다.

그는 데뷔 이후 ‘비오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 등의 노래를 발표했다.

가수 주현미는 데뷔 후 학력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그는 중앙대 약대 출신으로 약사로 일하면서 약국을 운영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약사 출신 가수로 불리기도 했다.

주현미는 남편 임동신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신랑의 직업은 기타리스트다.

남편과의 결혼 후 주현미는 한국 국적을 취득했으며 이전에는 대만 국적의 화교 출신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수 주현미는 배우자와의 결혼 후 아들 1명과 딸 1명을 자녀로 둔다.

특히 딸 임수영은 2017년 가수로 데뷔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주현미와 남편의 결혼과 첫만남 그리고 비밀연애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였던 주현미의 남편. 결혼 발표 당일까지 정말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두 사람을 연결한 것은 역시 음악이었다고 한다.

비밀 연애를 한 이유는 남편이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 멤버였기 때문에 외국 공연을 함께 다녀와 연락을 주고받았고, 야시장 공연을 하고 만나면 자연스럽게 밤늦은 시간에 만나느라 걸리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주현미가 바로 트로트 퀸이었다면 남편 임동신은 기타 세션에서 주목받은 뮤지션이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기타를 잠시 놓기도 했다.

조력자로 남아 모든 것을 지원하게 된 것이다.

아이돌이 한창이던 90년대 초 임동신이 만든 곡 ‘추억으로 가는 그대’가 큰 인기를 얻으며 트로트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아내 때문에 자신의 음악은 포기하고 주·효은미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남편 임·돈 죄. 누구보다도 남편의 외가 쪽 조카를 잘 알고 있던 추·효은미는 남편에게 항상”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1989년의 연말 시상식에서 명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그때 수상 소감에서 다른 이야기는 없이”당신”만 부르던 추·효은미의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저”당신!
”라고만 했다.

이에 대해서 임·돈 그는 자신이 외부 도움을 특히 한 것은 아닌 것처럼 함께 음악을 하던 사이여서 서로 보완해야 할 점을 말하고 해서 그렇게 된 것 같다고 겸손하게 말하기도 했다.

주·효은미에이즈데마 이혼 관련 루머정상의 자리에서 갑자기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잠적했기 때문에 주·효은미은 다양한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에이즈에 걸리고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으며 이혼했다는 설까지 나왔다.

별들이 수도꼭지일수록 채널을 켜면 바로 나올 만큼 브라운관을 장악하고 있던 추·효은미이 갑자기 안 보이게 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실종 같이 활동을 그만두면”이것은 뭔가 있을 것”과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다.

에이즈 감염 설은 기사가 나오면서 시작됐다.

그 기사를 쓴 기자도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썼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 때 세계적으로 록·허드슨 등의 에이즈 감염설로 숨지는 등 이 병이 세계적 이슈가 되던 때였다.

그 후 에이즈가 유행처럼 번진 희생이 되어 버린 추·효은미과 남편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처음 임·동 신 씨는 너무 화가 났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과 너무도 다른 얘기인데 잘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해명도 없이 흘렸다고 한다.

주·효은미, 남편을 휴대 전화에 어떻게 보존했던 것일까?얼마 전까지 낭군님과 보존해 두었다고 한다.

그는 본인도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말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얼마 전 전화가 왔는데 ‘성남 친구’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했다.

나 성남 친구 없는데 왜 이렇게 뜨지? 라고 알아보니 딸이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고.그래서 딸에게 왜 이렇게 바꿔놨냐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성남에서 배드민턴을 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딸이 바꿔준 대로 성남 친구라고 말해놨다고 했다.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딸 수연부모님의 피를 이어받는지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하춘화는 옆모습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평했다.

엄마를 닮은 맑은 음색을 가지고 있으며 싱글 앨범을 내고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중 자신만의 음악색을 만들고 있는 가수다.

곡도 직접 쓰고 작사도 스스로 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현미는 정말 부모님의 재능은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아들 역시 피를 속일 수가 없었다.

하·중화학은 주·효은미의 아들과 딸의 수연이 호흡이 잘 맞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자 주·효은미은 생각보다 맞지 않는다고 답했다.

수연이 음악 공부를 전문적으로 하지 않아 곡을 쓰면 아들 준혁이 편곡하고 풀어 나가겠다고 두 사람을 맞붙여서 본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싸우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서로 의견이 그렇게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은 해외 음악 대학에서 공부를 해서, 자작 곡과 편곡, 노래도 부르고 있다고 한다.

하·중화학은 아들이 쓴 곡을 부르는 게 소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들 준혁은 어머니 때문에 노래를 쓰고 있다는. 2016년 주·효은미의 디너 쇼 무대에 함께 서서 무대를 함께 한 적도 있다.

주·효은미의 국적 그리고 화교주현미는 중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화교 3세 주현미는 결혼할 때까지 대만이 국적이었다.

본적은 산둥 성 마오핑 현이다.

지금도 이곳 화교들은 모두 대만 국적이라고 한다.

2남 2녀 중 장녀로 세 동생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고 한다.

화교라는 이유만으로 편견도 있었다고 한다.

동네 친구를 사귀지 못해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학교는 초등학교 때부터 화교학교를 다녔던 주현미. 지금도 다문화 가정하면 차별이 있지만, 그 시절은 얼마나 심했을까 하고 당시 차별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주현미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동네에서 놀리면서 심술궂은 분들이 차별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보면 생각나는 게 있다고 말했다.

바로 화교 신분으로 다른 나라에서 지낸 아버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알면 약대 출신 엘리트약국을 나와서 직접 약국을 경영하던 에리ー토츄·효은미. 중앙대 약대 출신이다.

약제사가 되어 어머니를 돕고 집을 뜯어고치다 꿈을 꾼 그녀였다.

처음부터 약사가 꿈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약사를 하라고 해서 약학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여성도 이제는 전문직에서 경제 활동을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라고 해서 약학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능력을 키우고 사회 활동을 해라”는 어머니의 말을 새긴 주·효은미은 그 뜻에 따라서 공부도 하고 직업의 길도 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의사 아버지가 사업에 손을 대는 바람에… 그렇긴아버지는 원래 한의사를 하고 있었다.

한의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아버지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대체 에너지 사업에 뛰어들었다.

원래 안정된 생활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트 코스터를 타고 있는 인생을 보내게 된 것이다.

집이 망하고 아버지가 외국에 도피하고 좀 나아지면 다시 돌아오고, 그런 인생이 반복됐다고 한다.

또 실패하면 또 외국에 가서. 대중없다 불안한 환경에서 살던 추·효은미은 어머니의 짐을 함께 나눌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돈을 고생하고 모아 두면 아버지가 한번씩 와서 모아 둔 돈을 다 가져가곤 했다.

하자 어머니는 학자금부터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므로 동네 연탄 가게에서 외상으로 연탄을 넣고 쌀 가게에서도 외상으로 빚을 하였으며, 더 모아 두면 다시 가져간 아버지였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추·효은미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너무도 컸다고 한다.

그런데 주·효은미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천국에 가서 아버지를 만났더니 자신이 반드시 용서를 구할 일이라고까지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것.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주·효은미이 아이를 데리고 나온 것을 보았는가, 아버지가 손에 만나고 싶다며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너무 컸다 추·효은미은 그만 끊어 버렸다.

아버지의 친구는 “아버지가 매우 아프다.

그래서 내가 대신 전화도 한 것이다”라며 주·효은미을 꾸짖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아버지와 왕래가 없었던 주·효은미은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아저씨가 무엇을 아느냐”라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마지막 전화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가 죽어 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효은미이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 어쩌지..”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아버지를 원망하는 뜻이 없어졌다는 주·효은미. 일본에 있던 아버지의 시신을 끌고 장례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장사를 지내고 공연을 바로 해야 했다고 한다.

그때 눈물이 많이 나오고 공연을 제대로 못한 기억도 있다고 한다.

약사의 딸이 대구이라니…이래봬도 가수에 반대한 어머니약제사를 하고 가수를 하면 주·효은미가 말했을 때, 어머니는 당연히 반대했다고 한다.

시키지 않도록 한다고 무조건 나섰다고 한다.

노래를 부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약국에서도 한다고 하면서 못 가게 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끝까지 주·효은미은 부른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는 텔레비전을 3년간 보지 않는다고 한다.

주·효은미이 나오자 어머니의 마음이 더 떨렸기 때문이다.

귀에 노래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너무 긴장하고 지켜보지 못했다고 한다.

주·효은미이 저녁이 되면 야간 업소에 출연해야 하기 때문에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고 가면 어머니는 잠시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보지 못하고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내가 너를 약사 선생과 그 호칭을 얻기 위해서 가르쳤는데, 이것이 무슨 탄타라인지 지나가는 아이도 너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어” 하며 슬피 울었다.

또 레코드 회사에서 전속 계약을 하기 때문에 계약금을 가져왔는데, 그 돈을 어머니는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넣어 놓았다.

딸을 파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필요하므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데, 당분간은 정말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어머니는 겨우 딸이 노래를 잘하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때는 노래 잘하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노래가 나오면”우리 딸 노래 잘하는군”이라는 목소리가 저절로 나온다고 말했다.